에드문도 수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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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문도 수아레스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선수 시절 발렌시아 CF에서 활약하며 구단 역사상 최다 리그 골 기록을 세웠고, 두 차례 스페인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40년대 발렌시아의 공격진을 이끌며 팀의 리그 우승을 견인했으며, 스페인 리그 득점 10위, 코파 델 레이 역대 득점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963년에는 발렌시아 감독으로 부임하여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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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문도 수아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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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에드문도 수아레스 트라방코 |
원어 이름 | Edmundo Suárez Trabanco |
애칭 | 문도 |
출생일 | 1916년 1월 22일 |
출생지 | 바라칼도, 스페인 |
사망일 | 1978년 12월 14일 (62세) |
사망지 | 스페인 |
포지션 | 공격수 |
선수 경력 | |
유소년 클럽 | 카카레쿠 레이오나 |
프로 클럽 | 1935–1936: 아틀레틱 빌바오 (1경기, 0골) 1939–1950: 발렌시아 (210경기, 186골) 1950–1951: 알코야노 (21경기, 9골) |
국가대표팀 | 1941–1942: 스페인 (3경기, 3골) |
감독 경력 | |
감독 팀 | 1951–1952: 에르쿨레스 간디아 1954–1956: 사라고사 1956–1957: 례이다 1957–1958: 쿨투랄 레오네사 1958–1959: 레알 히혼 1959–1960: 사라고사 1960: 헤레스 1960–1961: 바라칼도 1962–1964: 메스타야 1964–1965: 발렌시아 1965–1966: 메스타야 1966–1968: 발렌시아 1970: 레알 무르시아 1971: 레반테 메스타야 |
2. 클럽 경력
''문도'' 수아레스는 발렌시아 역사상 최다 리그 득점 기록을 보유한 선수로, 두 차례 스페인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1] 스페인 리그 역사상 최다 득점 10위와 코파 델 레이 역대 최다 득점 5위에 이름을 올렸다.[1]
강인한 육체를 앞세워 1940년대 스페인 축구계를 지배한 그는 에피, 아마데오, 아센시, 고로스티사와 함께 발렌시아의 강력한 공격진을 이끌며 팀을 리그 우승 경쟁 구도로 이끌었다.[1]
2. 1. 초기 경력 및 발렌시아 CF 입단
'문도' 수아레스는 고향 바스크 주의 여러 아마추어 구단에서 축구를 시작했지만,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그의 경력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그는 아틀레틱 빌바오와 계약했지만, 이 계약은 공화파 진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전 이후 권력을 잡은 프랑코 정권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1939년, 프랑코 정권군은 레반테 군사 지역에서 싸운 여러 선수들로 구성된 "레반테 회복"이라는 팀을 창설했다. 이 팀은 발렌시아가 전쟁 후 첫 상대로 선택했고, '레반테 회복'의 활약을 본 발렌시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시 선수단을 매입하였다.[1]이후 '문도'는 1939-40 시즌부터 1949-50 시즌까지 11시즌 동안 발렌시아에서 활약했다. 발렌시아에서 그는 경기당 0.92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발렌시아 역사상 최다 경기당 득점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1941-42 시즌과 1942-43 시즌에는 각각 27골과 28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올랐다.[1]
2. 2. 발렌시아 CF 황금기를 이끌다
''문도'' 수아레스는 1940년대 발렌시아 CF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였다. 그는 강인한 신체와 불굴의 의지를 가진 공격수였다. 에피, 아마데오, 아센시, 고로스티사와 함께 발렌시아의 강력한 공격진을 구성하여, '델란테라 엘렉트리카(Delantera Eléctrica, 전격 포워드)'라고 불렸다.[1]스페인 내전 직후, "레반테의 재건"이라는 팀을 통해 발렌시아에 합류한 문도는 1939-40 시즌부터 1949-50 시즌까지 발렌시아에서 활약하며,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41-42 시즌과 1942-43 시즌에는 각각 27골과 28골을 기록하며 피치치 트로피(피치치상)를 수상했다.[1] 발렌시아 소속으로 1941-42, 1943-44, 1946-47 시즌 라리가 우승, 1941, 1948-49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1949-50 시즌 이후, 문도는 알코야노로 이적하여 1950-51 시즌을 뛰고 은퇴했다.[1]
2. 3. CD 알코야노와 은퇴
1949-50 시즌에 6경기를 뛴 후, 문도는 발렌시아를 떠나 인근의 알코야노로 이적하였는데, 당시 알코야노는 1부 리그에 속해 있었다. 1950-51 시즌 동안 알코야노에서 활약한 후, 1부 리그에서 더 이상 활약할 수 없다고 판단한 문도는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1]3. 국가대표팀 경력
수아레스는 1941년과 1942년 사이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에 3번 출전해 3골을 기록했다. 그의 국가대표팀 첫 경기는 1941년 12월 28일, 스위스와의 경기였다.[1]
4. 감독 경력
수아레스는 1963년에 파시에기토의 후임으로 발렌시아 감독을 맡았다. 1963-64 시즌 리그에서 6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준우승을 기록하며 유임되었으나, 1964-65 시즌 리그 4위에 그쳐 사비노 바리나가로 감독이 교체되었다. 그러나 바리나가 감독 체제에서 1965-66 시즌 9위로 부진하자, 1966-67 시즌 다시 감독으로 복귀,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를 2-0으로 꺾고 우승했다. 1968년 10월 13일, 성적 부진으로 발렌시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4. 1. 발렌시아 CF 감독 부임과 코파 델 레이 우승
1963년, 수아레스는 발렌시아로 복귀해 감독을 맡았는데, 또 다른 발렌시아의 축구 전설인 파시에기토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강인함과 단순한 전술을 앞세워 발렌시아의 리그 성적을 개선시켜 6위를 기록했다.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는 사라고사와의 경기에서 논란 끝에 패했다. 그 해 좋은 활약을 펼쳐 감독 계약을 1년 연장했다. 그러나, 소속 구단이 리그에서 4위를 차지하면서, 구단 수뇌부는 바리나가를 감독진에 영입하였다. 바리나가의 입단 후, 소속 구단은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는데, 그에 따라 문도는 그 다음 시즌에 본래의 직책으로 복귀했다.1966-67 시즌, 그는 선수단 감독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결승전에서 2-0으로 이겨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 1968년 10월 13일까지 발렌시아 감독을 맡았는데,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었다.
4. 2. 감독 경력 마감
1963년, 파시에기토의 후임으로 친정팀 발렌시아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1963-64 시즌 리그에서는 6위를 기록했고,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는 레알 사라고사에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성과로 유임되었으나, 1964-65 시즌에는 리그 4위에 그쳤고, 사비노 바리나가가 감독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바리나가 감독 체제하의 1965-66 시즌은 9위로 부진했고, 1966-67 시즌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여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아틀레틱 빌바오를 2-0으로 꺾고 우승을 이끌었다. 1968년 10월 13일, 성적 부진으로 발렌시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5. 클럽 통계
클럽 | 시즌 | 리그 | ||
---|---|---|---|---|
디비전 | 출장 | 득점 | ||
발렌시아 | 1939–40 | 라리가 | 20 | 14 |
1940–41 | 22 | 21 | ||
1941–42 | 25 | 27 | ||
1942–43 | 22 | 23 | ||
1943–44 | 26 | 28 | ||
1944–45 | 21 | 17 | ||
1945–46 | 25 | 20 | ||
1946–47 | 10 | 10 | ||
1947–48 | 11 | 5 | ||
1948–49 | 22 | 19 | ||
1949–50 | 6 | 2 | ||
합계 | 210 | 186 | ||
알코야노 | 1950–51 | 라리가 | 21 | 9 |
합계 | 231 | 195 |
6. 수상 내역
구분 | 대회 | 우승 횟수 | 시즌 |
---|---|---|---|
발렌시아 (선수) | 라 리가 | 3 | 1941-42, 1943-44, 1946-47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 2 | 1941, 1948-49 | |
코파 에바 두아르테 | 1 | 1949 | |
개인 | 트로페오 피치치 | 2 | 1941-42, 1943-44 |
발렌시아 (감독)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 1 | 1966-67 |
6. 1. 선수
문도 수아레스는 발렌시아 구단 역사상 최다 리그 득점 기록을 보유한 선수로, 발렌시아 지지자들 사이에서 추앙받고 있다. 그는 현역 시절 두 차례 스페인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으며, 스페인 리그 역사상 최다 득점 10위와 코파 델 레이 역대 최다 득점 5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그는 강인한 육체적 힘을 바탕으로 1940년대 스페인 축구계를 지배했다. 에피, 아마데오, 아센시, 그리고 고로스티사와 함께 발렌시아의 막강한 공격진을 이끌며 팀을 리그 우승 경쟁 구도로 이끌었다.
수아레스는 고향 바스크 주의 여러 아마추어 리그 구단에서 활약하다가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큰 변화를 겪었다. 아틀레틱 빌바오와 계약되어 있었으나, 공화파 진영에서 이루어진 계약이었기 때문에 친프랑코 정권 집권 후 계약이 백지화되었다. 1939년, 동부 지역 전선에 참전한 여러 선수를 중심으로 친프랑코파 군인들은 "레반테의 재건"이라는 구단을 창설했다. 이 선수단은 스페인 내전 후 발렌시아의 눈에 띄었고, 발렌시아는 즉시 선수단을 매입하였다.
문도는 "레반테의 재건" 매입 후, 1939-40 시즌부터 1949-50 시즌까지 총 11시즌 동안 발렌시아 선수로 활약했다. 발렌시아에서 경기당 0.92골을 기록하며 발렌시아 역사상 최다 경기당 득점 기록을 세웠고, 1941-42 시즌과 1942-43 시즌에 각각 27골, 28골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1949-50 시즌에 6경기를 뛴 후, 문도는 알코야노로 이적했는데, 당시 알코야노는 1부 리그에 속해 있었다. 그는 1950-51 시즌 동안 알코야노에서 활약한 후, 1부 리그에서 더 이상 활약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대회 | 우승 횟수 | 시즌 |
---|---|---|---|
발렌시아 | 라 리가 | 3 | 1941-42, 1943-44, 1946-47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 2 | 1941, 1948-49 | |
코파 에바 두아르테 | 1 | 1949 | |
개인 | 트로페오 피치치 | 2 | 1941-42, 1943-44 |
6. 2. 감독
수아레스는 1963-64 시즌에 발렌시아로 돌아와 감독을 맡았다. 그는 발렌시아의 또 다른 축구 전설인 파시에기토의 뒤를 이었다. 그는 강인함과 단순한 전술을 바탕으로 발렌시아의 리그 성적을 향상시켜 6위를 기록했다. 인터시티스 페어스컵에서는 사라고사에 패했지만,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감독 계약을 1년 연장했다. 그러나 리그에서 4위를 차지하면서 구단 수뇌부는 바리나가를 감독진에 합류시켰다. 바리나가 영입 이후, 구단은 기대 이하의 성적을 냈고, ''문도''는 다음 시즌에 원래 직책으로 복귀했다.1966-67 시즌, 그는 선수단 감독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결승전에서 2-0으로 승리했다. 그는 1968년 10월 13일까지 발렌시아 감독을 맡았으며, 해임 당시 선수단의 활약은 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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